마음 비워두는 곳

[스크랩] 나의 진실을 찾아(삶이라는 연극의 역할놀이)

고무동 2009. 8. 6. 13:13

<설악산 성국사>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나’라는 모습,
그것이 나인 것은 아니다.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나’,
내가 ‘이러이러하다’라고 알고 있는
바로 그 내가 진짜 나일까?

그 모든 것은 다만 아상의 감옥일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
선생님일수도 있고, 사장일수도 있으며,
스님일수도, 학생일수도, 공무원일수도,
혹은 부모이거나 자식일수도 있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나’는
상황에 따라, 환경에 따라, 때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회사에서는 사장일수도 있고, 과장일수도 있으며,
말단 사원일수도 있고,
집에 돌아오면 한 집의 가장일수도, 자식일수도 있고,
또 주말에 있는 모임에 가면 회장일수도, 총무일수도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의 아상, 우리의 에고,
우리의 위상은 달라진다.
상황에 따라 우리가 바로 그 곳에서 해야 할 몫의
연극을 해 내면서 살아간다.

어디 그 뿐인가.
가게에 가면 손님의 위치로 바뀌였다가,
차를 타면 승객이 되고,
복지시설에서는 자원봉사자로 탈바꿈한다.

하루에도, 아니 매 순간마다
우리의 자아는 그 상황에 걸맞는 연극을 한다.
바로 그 역할이 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역할들의 특성은 어떠한가?
어느 한 가지 역할만이 나의 본래적인 자아이거나,
‘나의 본질은 이거야’라고 할 만한 정해진 본연의 역할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끊임없이 역할을 바꿀 뿐이다.
바로 이 역할 놀이,
연극의 배역을 끊임없이 상황따라 바꾸어가는
바로 이 영화같은 배역 놀이야말로 우리 삶의 생생한 현실이다.

그때 그때마다 바로 이 상황극을 잘 할 줄 아는 것이
삶에서 매우 중요한 촛점이 된다.
그 삶의 배역을 온전히 잘 해 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나에게 배역이 주어질 때
바로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배역에
나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완전히 용해될 수 있어야 한다.
그 순간, 바로 그 배역과 그 배역의 행위와 완전히 하나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 순간,
그 배역이야말로
내가 삶에서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다.

최고의 배우는 영화를 찍을 때마다
그 배역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완전히 그 역할에 몰입함으로써
바로 그 자가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영화가 끝나고 다른 영화, 다른 배역이 주어지면
곧바로 또 다시 새로운 배역에 완전히 용해됨으로써
이전의 역할을 잊고 새롭게 주어진 역할과
새롭게 하나를 이룰 줄 안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이 역할놀이에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그 역할이 주어질 때
그것에 온전히 깨어있는 의식으로 최선의 연극을 다하되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즉 바로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할지언정
그 역할이 나 자신인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 잠시 인연 따라 주어진 배역과 나 자신을 동일시 해서는 안 된다.
그 배역을 최선의 집중으로 행할지언정
그 역할 자체에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그 배역을 정해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 배역은 ‘내 것’이 아니다.
잠시 내가 연극을 한 것일 뿐이다.
바로 이 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훌륭한 배우는
한 영화가 끝나고 새로운 영화를 시작할 때
이전 영화 속의 배역을 완전히 잊고
새로운 배역에 100% 에너지를 쏟는다.

과거의 배역이 아무리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배역이었을 뿐이다.
그 배역에 빠져 있는 한 새로운 배역을 소화하기는 힘들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우리 삶에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지켜보아야 할 삶의 실천덕목이다.

이것을 놓치는 순간,
우리 삶은 고통과 번뇌와 마주할 수밖에 없는 지점에 놓이게 된다.

그 배역을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그것이 단순히 하나의 배역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정체성인 것으로 오인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상이며, 에고의 거친 감옥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스님이 스님이라는 독특한 배역을 행하긴 할 지언정
그 배역이 자기 자신인 것으로 오인하여
‘스님’이라는 역할을 자기 정체성으로 집착한다면
그 사람에게 더이상 스님이라는 맑은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다.
스님은 자신이 스님의 역할을 할 지언정
그 역할에 빠지지 않는 자다.

사장이라는 역할, 회장, 부장, 국회위원, 교수, 선생님, 의사, 변호사,
그 배역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직업이나 역할을
‘나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오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스게 소리로,
오랜 군생활을 하는 직업 군인 아버지가
집에서도 아내와 자녀들에게 매일 아침 점호 집합을 시키고,
명령하듯 이것 저것을 시키더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처럼 착각 속에 빠져 살곤 한다.

그것은 완전히 삶이라는 역할 놀이에 실패한 것이다.
출근해서는 완전히 군인이 되어서
군인의 역할에 완전히 몰입함으로써 온전한 한 사람의 군인이 되어야 하지만,
퇴근하는 순간 군인을 완전히 잊고
아버지라는 배역으로 완전히 돌아와야 한다.

집에 퇴근해서까지 회사의 일로 고민한다는 것은
역할 놀이를 완전히 망각한 채,
도대체 삶을 생생히 살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퇴근을 해서도 여전히 회사의 사장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거나,
여전히 회사의 일로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느라고,
자녀와 아내와의 소중한 순간을 허비한다면
아, 이 얼마나 삶을 헛되이 소모하는 일인가.

내가 아는 한 회사의 중간 관리자 분께서
오랜 회사 생활을 마감하면서 한 말은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25년 정도 회사 생활을 하면서 도대체 무엇을 하며
어떻게 달려 왔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죽자 살자 뒤도 옆도 안 보고 앞만보고 달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잘 사는 것인 줄 알았고, 회사를 위하는 일이고,
동시에 가족을 위해 잘 하고 있는 것인 줄 알았지요.
그동안 오직 회사와 회사에서의 성공과 진급이 내 삶의 중심이었어요.
그동안 가족들과는 맘 편히 휴가 한 번 다녀오지 못했고,
주말에도 밀린 업무 때문에 가족과 기억에 남는 나들이 한 번 못했습니다.
평소에는 아이들과 대화를 못 하다보니
이제는 훌쩍 커버린 아이들과 서먹서먹 해 졌을 정도지요.
이제 정신 차리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려 해도 이젠 애들이 다 커서
나를 필요로 하지를 않아요.
어떻게 살아 온 건지, 뭐가 맞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회사에서는 회사일에 최선을 다하되,
퇴근 후에는 완전히 회사일을 마음에서도 퇴근을 시키고,
집에 돌아오면 완전히 아버지와 남편의 역할에
최선으로써 집중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평일에는 회사 일에 집중하더라도
주말에는 완전히 주말을 보낼 줄 알아야 한다.

현대인들의 엄청난 일 중독은
하루 24시간, 주말도, 휴가도 반납하며 일에 매달리고,
심지어 자신의 삶 조차 반납해가며 일에 매달리는 것을
능력 있고, 우수한 인재인 것으로 떠받들고 있는 듯 보인다.
과연 그럴까?

퇴근 후에 완전히 아버지로 남편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은
회사에서 일을 할 때에도 완전히 순수하게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
순수하게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 욕심과 집착이라는 ‘아상’에 기초한 위에서 일을 행한다.

진급도 해야 하고, 인정도 받아야 하고,
그러려면 일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다.
그저 순수하게 오직 나에게 주어진 삶의 역할로써
그저 그 일 자체로써 일하는 것이 아니라
아상이라는 삿된 욕구가 개입된 채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상이나 욕심이 개입됨 없이
오직 순수한, 내 삶의 주어진 몫으로써
오직 그 순간에 ‘함이 없이 그 일을 행한다면’
‘집착 없이 그 일을 행한다면’
분명히 그 사람은 퇴근과 동시에 그 일을 놓아버리고
또 다른 가족으로써의 몫에도 순수하게 동참할 수밖에 없다.

다시 불교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불교에 종단이 있고, 스님들의 승납이나 위계가 있고,
스님으로써의 위의와 행동양식이 있으며,
스님과 신도, 스님과 종단 등에 어떤 특정한 질서가 있는 것들은
오랜 불교 역사에 따른 하나의 방편적인 문화현상일 뿐이다.

그 모든 것은 역할 놀이의 감초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방편들일 뿐이다.
그저 밋밋하면 재미가 없지 않나.
그래서 하나의 장엄과 예배 등의 불교문화로써 자리잡은 현상들이다.

그런데 여기에 병폐가 생겨나기도 한다.
그 역할놀이에 필요한 다양한 장치와 문화와 위의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방편임이 잊혀지고
그것 자체가 ‘불교’의 ‘불자’의 ‘또 ‘스님’의 정체성인 것으로
착각되고 있는 현상이다.

물론 그런 것들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법랍이 얼마가 된 스님은 어떤 가사를 입고,
또 스님과 신도 사이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며,
불자로써 절에 가서는 어떤 예절을 어떻게 지켜야 한다는 등의 것들은
하나의 감초같은 방편들일 뿐이며,
어디까지나 불교문화와 역사의 과정에서 파생된
하나의 약속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불교 그 자체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 똑같은 불교 승가일지라도
나라마다 예절과 문화와 수행방식과 가사 장삼의 모습 등
모든 것들이 다 다르거나,
혹은 한 나라에서 금기시하는 것들이
다른 나라의 절에서는 일반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 방편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참된 불교는 그 모든 것들을 뛰어넘어 있다.
그것에 너무 얽매여 집착하게 되면 이제는 주객이 전도된다.
본연의 진리와 방편이 뒤바뀌는 것이다.
방편에 얽매여 진리의 자유로움이 갇혀버리곤 하는 것이다.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스님이라는 이름인가, 깎은 머리인가, 회색 승복인가?
이런 틀들은 때때로 ‘나 자신’이라는 하나의 자유로운 존재를
억압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계율이 처음에는 필요하지만 깨닫고 나면 필요가 없어지는 것처럼.

사회적인 위치로써의 ‘나’와 본연의 나 자신 사이에 놓여 있는
쉽게 넘을 수 없는 드넓은 강을 보라.
그 둘 사이의 거리감, 공간을 분명히 보고 있는가.

‘나’는 그저 ‘나 자신’이었을 때
완전히 자유롭고 걸림 없는 드넓은 존재의 강을 이룬다.
결국에 가서는 ‘스님’이라는 틀을 완전히 벗어나
걸림이 없어졌을 때
그래서 순수한 자기 자신이 되었을 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자’ ‘스님’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역할에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장’이라고, ‘연예인’이라고, ‘회장’이라고, ‘성직자’라고
높은 자리에 있다고
그 자리가 나인 것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매 순간 우리는 역할 놀이를 할 지언정
그 역할이 나 자신이 아니라는 점을 사유해야 한다.
그 역할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며,
잠시 아주 잠시 내게 주어진
이번 생의, 혹은 잠시 동안의 배역일 뿐이다.

그것이 나인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을 때 우리는 매 순간
어떤 ‘역할’로서가 아닌
순수한 ‘한 존재’로써
바로 그 순간을 온전히 살 수 있게 된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누구로써’가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의 한 존재로써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랬을 때
장군이 이등병을 만날 때도
장군과 이등병의 그 모든 거리감과 형식을 놓아버린 채
순수한 한 존재가 또 다른 순수한 한 존재를 마주하게 되고,
사장이 자신 회사의 경비를 만날 때에도
‘내가 사장인데’ 하는 상 없이
그저 순수한 한 존재와 둘도 없는
만남의 꽃을 피워낼 수 있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부모이고 너는 내 자식일 뿐이다’
‘너는 내 말에 따라야 한다’고 하는
부모 자식 지간의 일반적인 편견과 역할 동일시 없이
오직 순수한 한 존재가 또 다른 한 존재와
자연스럽고 향기나는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랬을 때 모든 존재와의 만남은
붓다와 붓다가 서로 만나는 것과도 같은
깊은 영적인 교감이자
영적 성숙의 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역할을 하되 그 역할에 자신을 동일시 하지 않을 때,
비로소 모든 관계는 순수해지며
삶의 영적 진보가 시작된다.
그렇게 만나는 모든 관계는
존재의 성숙과 진화를 위한 창조적인 관계로 발돋움한다.

바로 그 순간,
비로소 내 안에 켜켜이 쌓인
어둡고 탁한 억겁의 탁류가
맑은 개울이 되어
우리 존재 위를 도도하게 흐르게 된다.

영화배우가 역할에 몰입하지만
촬영이 끝나면 다시 배역을 완전히 떠나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듯,
삶에서 내게 주어진 역할에 매 순간 순간 최선의 깨어있음으로 그것을 행하되,
그것에 얽매이지 말라.
머물지 말라.

그것이 ‘나’라는 착각을 완전히 거두라.
배역을 하되
마음은 배역에서 완전히 떠나라.
배역은 단지 배역일 뿐 내가 아니다.

그러면 참된 진짜 내 배역은 무엇인가.
가짜의 역할이나 배역 말고
진짜배기 ‘나’는 누구인가!

배역을 하되
배역에 집착함이 없이
다만 순수한 깨어있음으로
순간 순간의 순수한 역할을 관하게 될 때
비로소 가짜의 역할이 아닌
진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게 된다.

참된 나를 찾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 뿐이다.
이번 생에서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몫, 삶의 배역을
온전한 집중과 알아차림으로 행하되
거기에 집착하거나 얽매임 없이 행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이끄는 지고의 수행이요
붓다가 말한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법상스님>


출처 : 나의 진실을 찾아(삶이라는 연극의 역할놀이)
글쓴이 : 솔 향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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